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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고 - 과천중, 한국조리과학고, 경희대 조리과, 해병대, Seinäjoki Univ, 경희대 식품생명공학과, 쟈뎅, 코딩 부트캠프, 헬로네이처, 밸런스히어로, 11번가, 라인플러스
    Routine 2021. 12. 15.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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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품연구원에서 개발자로 전직(직무전환)한 이야기 (feat. 8개월)

    17년 7월, 저는 식품연구원으로 재직하던 회사를 그만두고 18년 3월 비전공자 개발자(데이터 엔지니어 신입)로 취업에 성공하였습니다. 직무전환에 대한 글은 많지만 식품연구원에서 개발자로의

    kadensungbincho.tistory.com

     

    우리는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어떤 조직에 속해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환경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일부를 결정짓는데요 [1]. 소속에 따라서 다양한 행동양식을 개발해나가기도 합니다 [2].

     

    그렇기에 한 개인의 앞으로를 살펴보고자 한다면, 현재의 조직보다는 그 개인이 과거에 한 조직에서 다른 조직으로의 이행(transition)을 어떠한 패턴으로 수행했는가를 참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 저는 30대를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제 인생의 이행들을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어떻게 한 조직에서 다른 조직으로 이동했고, 어떠한 이유로, 어떠한 생각으로 이행했는지 돌아보려 합니다. 또한, 당시의 상태와 감정을 기억해보며, 어떤 열망과 착각이 있었는지 곱씹어 보려고 합니다. 그러한 회고를 통해서 앞으로의 이행을 더욱 제 내면을 충족하는 방향으로 설계해보고자 합니다. 

     

    또한, 밝고 어두운 실패사례를 공유하여 다른 분들이 조금이나마 참고하실 수 있는 내용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Image from Unsplash

     


    과천중에서 한국조리과학고

    상태

    전교생이 600 ~ 700명? 정도에 성적은 100등 언저리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중 2, 3에 반장을 한 번씩 했었는데 과거를 회상하면 딱히 될 이유가 없었는데 되서 '엄마가 선생님에게 촌지 비스무리한 걸 줬나?'하고 의심하곤 했습니다. 

     

    감정은 가정사로 인해 전반적으로 조금 축 쳐지고 수심에 잠긴 시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중 2때 1등인가 했던 걸로 기억하는 자동차 경주용 조립차 - Image from Author

    Why?

    조리쪽으로의 긴 여정의 시작은 아마도 어머니가 보시던 신문의 기사로 추측됩니다. 중 3 여름이 가까웠던 시점에 어머니는 조리과학고에 매료되셨습니다. 원래도 주변에 좋은 대학을 나와서도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사례를 많이 보셔서 그런지 조리사, 배관공, 설비기사 등 회사원보다는 기술로 살아남는 직업에 대한 강한 선호를 가지셨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러한 선호와 신문기사의 한국조리과학고 광고와의 만남으로 인해 어머니는 저에게 한국조리과학고 진학을 강하게 드라이브하셨습니다. 중3 대부분의 친구들은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테스트? 같은 것을 준비하였고, 이미 진학이 결정된 저는 상산고, 과학고, 외고를 가는 친구들과 같이 뒷자리에서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How?

    당시 한국조리과학고의 커트라인이 그다지 높진 않았기에, 서류를 붙고 간단하게 면접정도를 봤었던 것 같습니다. 플레인한 답변을 통해 무난하게 합격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국조리과학고에서 경희대 조리과

    상태

    성적은 학교시험 전교 1등 여러 번, 수능 311 정도로 기억합니다. 중학교 때 전교 100등 언저리에만 있다가 고등학교로 올라와 다른 환경에서 전교 1등을 하고나서 자신감이 많이 상승했던 기억이 있네요. 

     

    좋은 친구들도 있었고, 테크토닉과 같은 춤 장기자랑도 하였는데요.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중학교, 고등학교 사진을 볼 때 나서는 일에 있어서 위축되어 보이는 사진이 많습니다. 항상 단체 사진을 찍으면 우상단 구석에 위치하네요:

     

    중학교 단체사진 - Image from Author

     

    고등학교 단체사진 - Image from Author

     

    Why?

    위와 같은 성적에 당시 실업계 전형을 탄다면 연대, 고대를 노려볼 법 한데요. 어머니는 좋은 대학교 경영학과 같은 것은 쓸모 없다는 (작은 표본에 의존해 믿고 있는) 편견이 강하셨던 것 같습니다. 기억으로는 할머니까지 가세하셔서 경희대 조리과로 강하게 드라이브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려대 심리학과 같은 곳을 가고 싶었으나 경희대 조리과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매우 오랫동안 후회하고 원망했던(타인, 자신을 포함해) 부분은 아래와 같습니다:

     

    1. 고집을 세워서 내 자유의지로 선택하지 못한 점
    2. 일단 과는 상관없이 학교라도 더 이름이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한 점
    3. 넥스트를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조리과를 선택한 점

     

    How?

    성적에 맞춰서 가나다(?)군에 각각 지원하면 실업계 전형으로 실업계 친구들끼리 상대적으로 순위가 매겨서 결정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른 군에 연세대 경영학과를 넣었었는데, 예비 1인가 2었던 기억이 있네요. 경희대는 합격이 되었기에 다른 옵션을 고려하지 않고 경희대로 직행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고등학교 졸업 - Image from Author

     

     

     

    경희대 조리과에서 해병대

    상태

    해병대 가기 전 1학년 성적은 B+ 정도 되었던 것 같네요. 술 먹고, 당구치고, 소모임하고, 술 먹는게 주를 이루는 일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이미 대부분을 경험했고 (학교 특성 상 자취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당구는 재미가 없고, 소모임이나 수업에서 하는 조리도 이미 고등학교 때 익숙했기에 딱히 흥미롭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감정적으로는 새로운 조직, 신비로운 대학 활동도 잠시 뭔가 비생산적이고 목표가 없다는 느낌에 루즈했던 것 같습니다.

     

    Why?

    돈은 1학기에 400 ~ 500만원 내는데, 별로 얻어가는 것이 없다는 생각도 많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집안 경제사정이 조금 쪼들리는 상황이었고, 학교 자체도 재미도 없는데 일단 군대나 가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경험과 배움을 위해 도전한 부산 무전여행 - Image from Author

     

    하필 해병대였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뭔가를 배우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가 있었고 '뭔가 더럽고 힘든 젊은 시절의 고생'이라는 착각이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이 '젊은 시절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에 기반한, 오랜 기간 잘못된 성의없는 결정은 제가 이후의 삶에서도 이행의 시점에서 짧은 생각으로 몇 년 간의 소중한 노력을 탕진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훈련소 - Image from Author

     

    How?

    그래도 조리에 도움이 되는 시간을 보내고자 해병대의 '주계병'을 지원하였습니다. 간단한 체력 테스트를 하고(했었나 기억이 잘...) 면접을 보고 통과했습니다. 대학교에 가서는 멋진 몸을 바라면서 헬스장도 다녔기에 조금 무난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상병? 시절 - Image from Author

     

     

    복학 후 Seinäjoki Univ 교환학생

    상태

    거의 가장 먼저 군대에 가서 돌아왔기에 남자 동기 없는 상태에서 혼자 복학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친구들이랑 술도 안먹고, 당구도 안치기에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요. 예전부터의 로망이었던 도서관 건물에 자주가며 독서를 많이 했습니다. 텍스트에 대해서는 고등학교 때부터 무협, 판타지 소설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익숙했고, 그 부분을 방향만 조금 바꿔서 경제, 경영, 자기계발, 과학, 인문 등 여러 방면으로 조금씩 폭을 넓히며 도전했던 것 같습니다. 

     

    우연히 닿은 이러한 독서 습관을 단단하게 갖춘 것이 이후에도 부담없이 책을 가까이하는 것에 큰 기반이 되었습니다. 

     

    성적은 수업이 재밌지도 않고, 올리는 데 큰 관심도 없었기에 여전히 B+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재미없고 유익해보이지도 않는 수업 A+ 맞아서 취업을 준비하느니, 나에게 맞는 공부들을 열심히 하면 뭐라도 되겠지라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이후의 식품생명공학과 복수전공이라는 선택은 당시 최선이었으나, 좀 더 도전적으로 아예 전공을 갈아엎고 변경해서 컴퓨터공학, 생물학, 전자공학과 같은 어쨋든 취직 시장에서 선호되는 곳으로 이동해도 충분히 좋은 시기였다는 후회가 있습니다(지금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 몇 년의 조리 경험과 조리과는 아직 여물지 못한, 충분히 버릴 수 있는 카드였는데 당시에는 그것에 의존하는 정체성이 매우 컸던 것 같습니다. 진짜 조리를 하고 싶다면 알바로라도 꾸준히 미슐랭 레스토랑이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는게 더 빠를 것 같기도 했고요 (조리쪽으로 간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을 수 있는 과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학교 조리 보조 일 - Image from Author

     

    무튼 다양한 알바 경험과 학교에서도 일을 하며 사회경험을 갖추게 되었는데요. 심리학 책도 많이 읽으면서 자신을 좀 더 알아가고 감정적으로도 안정되는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핀란드에서 스웨덴으로 넘어가는 페리?였나..? - Image from Author

     

    Why?

    먼저 경제적으로도 집에서 지원해줄 여유가 있었습니다. 또한, 누나도 미국에 있었기에 외국 경험이 얼마나 안목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꾸준한 조언을 들었었습니다. 왠지 교환학생이라는게 스펙도 될 것 같고, 지금 아니면 경험하기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지원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교환학생을 지원하였고 핀란드의 세이나죠키 대학이 당첨되어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습니다. 

     

    How?

    비교적 저렴한 국가도 있었으나 성적?과 같은 것으로 우선권을 주었고 당연히 많이 밀려서 간신히 핀란드 시골의 한 대학에 교환학생을 갈 수 있었습니다. 정보가 빠른 친구들은 안정적인 선후배 관계에서 받은 팁들도 잘 준비를 했었던 것 같은데요. 복학 후 도서관과 학교에서 하는 일로 편향되어 있는 탓에 준비에 미숙했고 되는 대로? 가게 된 것 같습니다. 

     

    Seinajoki Univ 학교(좌), 기숙사(우) - Image from Author

     

     

    귀국 후 경희대 식품생명공학과 복수전공

    상태

    성적은 전반적으로 B+대였습니다. 귀국 후에는 뭐라도 쌓아서 취업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강했는데요. 애초에 식품생명공학 + 조리과 테크를 타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경기도 수원(식품생명공학과가 있는 캠퍼스)캠퍼스 주변 고시원에서 살며 1학기 식품생명공학과 수업을 듣기도 했습니다. 또 때로는 홍대(당시 집) - 회기(서울캠) - 수원(수원캠)을 하루에 이동하며 듣는 고된 일정을 소화해야 했습니다.

     

    통학 거리 - Image from Author

    식품생명공학과는 이과로 생물학, 공학 등을 포함하고 있어서 취업의 압박감을 느끼면서까지 시작하기 쉬운 과는 아니었습니다. 조리과와의 공통점은 조리과학, 식품학 정도만 존재하였고요. 통학에 기본 점수는 내야되서 전반적으로 꽤나 터프한 일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잘한 선택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조금 있고, 네트워킹도 못하고 양쪽 공부와 스펙 준비만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렇다고 조리과만 한다고 해서 딱히 답이 있었던 것은 아니긴 합니다. 

     

     

    Why?

    같은 과 선배 중에 조리과 + 식품생명공학 테크를 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조리'라는 부분이 매우 주관적이기에 공학이라는 부분은 그래도 기술 기반이니 배워두면 식품업체, 유통업체 등 다양한 곳에서 강점을 가질 수 있겠지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나고 나서도 실생활에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복수전공을 하고서 등록금이 조금 덜 아까운 느낌은 있긴 했습니다 :)

     

    또한, 당시 헤스톤 블루멘탈(솔?)과 같은 과학적(?) 조리사에 대한 열망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Modernist Cuisine과 같은 책들을 보며 과학적인 부분을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네요.

    Heston Bluementhal - Image from Wikipedia

     

    흥미 반, 뭐라도 해야겠다 반으로 농촌체험 - Image from Author

     

    How?

    대학 들어가는 것에 비해서 일부 과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손쉽게 복수전공을 하거나 전공교체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대로 성적을 받고 이수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긴 하나, in은 쉬웠고 이수는 조금 섣부르고 손쉽고 빠른 선택과는 달리 매우 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투입되었습니다. 

     

    일단 진입하였고, 재미는 있었기에 다른 것 따지지 않고 주구장창 팠던 기억이 나네요.

     

    식품품질관리학 과제 수행 - Image from Author

     

    대학교 졸업 후 쟈뎅으로 취업

    상태

    소속이 없어진다는 두려움에 밑도 끝도 가지리 않고 아무데나 다 넣었던 것 같습니다. 조리도 되고, 식품도 되기에 호텔, 유통, 식품 등등 가리지 않고 다 지원했는데요. 애매한 성적과 준비 안된 면접 때문인지 대부분 떨어졌습니다. 

     

    감정적으로 압박을 느꼈고, 질질 끌기 보다는 눈을 낮춰서라도 가자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렇게 쟈뎅이라는 중소 식품기업에 입사하였고, 커피 및 음료 개발 연구원 커리어를 시작하였습니다.

    분투했던 것 같은 이력서 리스트 - Image from Author

    Why?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착각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생각이 더더욱 '일단 뽑아만 주면 간다'라는 마음을 먹게한 것 같습니다. 특히 이 시점에 '일단 입사하고보자 넥스트는 들어가서 생각하면 되겠지'라는 착각도 매우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로는 식품회사에 들어가셨다가 조리로 전향하여 꽤나 입지를 다진 분도 계시니 식품연구원 커리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한 스텝이 다음 스텝이 어디로 갈지의 방향성을 제공함과 동시에 매우 제한하는데요. 충분히 고민을 가지고 심사숙고해도 될 문제를 여러 상황상 나라도 자리를 잡자는 짧은 생각에 해결하려 했던 것은 매우 큰 잘 못인 것 같습니다. 

     

    회사를 다니며 나름 분투했으나, 그 시점에 고민해볼 수 있는 넥스트는 남양유업, 매일유업, 서울우유 정도의 연구원이었고 석사가 아니라면 지원도 어려운 곳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커리어를 위해 다닌 맥주 학원의 몰트들 - Image from Author

     

    사비로 다닌 Emass HPLC 교육 - Image from Author

    How?

    지원 후 연구부장님 면접과 사장님 면접을 진행 한 후에 근무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력서를 여기저기 조합해 수십 곳을 지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일본 Foodex 출장 중 신주쿠 Blue bottle 앞 - Image from Author

     

    과장님과 함께 의미있었던 풀코스 - Image from Author

     

    쟈뎅 퇴사 후 패스트캠퍼스 데이터사이언스스쿨

    상태

    느낌은 이대로 계속 가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대로 일하면서, 이대로 늙고, 이대로 커리어가 굳으면 점점 더 넥스트는 제한되어 간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떻게든 피봇을 해야했습니다. 

     

    식품연구원에서 개발자로 전직(직무전환)한 이야기 (feat. 8개월)에도 기록되어 있으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고, 지쳤던 것 같습니다.

     

    Why?

    이왕 이렇게 된거 내 생각이 진짜 가능성이 많은 분야로 오로지 내 마음대로 결정을 해보자라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쟈뎅에서 느꼈던 좌절감이 지난 10년 간 쌓아온 패가 그리 크지 않다는 마음도 먹게해준 것 같습니다.

     

    일단 멈추고 (멈춘다는 것 자체가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이긴 하나 ;;), 오리지널스[3]에서 말하는 대로 최대한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식품 관련 재취업을 지원하면서 패스트캠퍼스 데이터사이언스스쿨을 통해 직무전환을 하려 했습니다. 아쉽게도(?) 식품 재취업은 모두 떨어졌고, 패캠이 끝나갈 시점에는 it쪽으로 가야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또한, 쟈뎅을 다니면서도 호기심에 고려대학교 사이버대학 소프트웨어공학과를 수강하고 있었습니다. 

     

    지원하는 내내 구인하는 기업이 많아서, '부족한 것은 내 실력이지 구인시장이 아니다'라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패캠 공부 중 - Image from Author

    How?

    패캠에서 제공하는 커리어 서비스 외에도, 이력서를 부분부분 조합해서 50 ~ 100곳 정도 지원한 것 같습니다. 데이터사이언티스트 쪽으로 지원했으나, 포트폴리오를 보시고 데이터엔지니어로 근무해볼 생각은 없냐고 물어봐주셨고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야근 from Hellonature - Image from Author

     

     

    헬로네이처에서 밸런스히어로

    상태

    MySQL, 파이썬, AWS 약간 정도씩만 사용하며 8개월 정도가 지난 시점 BGF가 헬로네이처를 인수하면서 데이터팀장님을 포함해 많이 탈출이 시작됬습니다. 저도 주니어 시간이 소중하다는 강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배울 곳있는 리드가 있는 곳을 찾아보곤 했습니다.

     

    헬로네이처를 다니면서는 감정적으로는 그래도 IT쪽으로 일을 시작했으니 안정감이 왔습니다. 실력만 있으면 또 좋은 곳에서 좋은 동료들과 일할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구요. 파이콘과 같은 컨퍼런스도 찾아가서 로망을 키우고, 여자친구를 안보는 시간에는 대부분 공부를 했던 것 같네요. 

     

    2018 파이콘 - Image from Author

     

    특히, 초반에 늦은만큼 모든 IT 관련 문서는 영어로 된 대체재가 있다면 영어 텍스트로 본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이후에도 여러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되는데요. 소스코드를 읽을 때 발현되는 뇌 부위와 영어 텍스트를 읽을 때 발현되는 부위가 같다는 점등을 고려할 때 [4], 전반적인(?) 코딩 실력을 성장시킬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Why?

    보고 배울 사람도 없이, 신입이 혼자 일을 하게 되는 것은 최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헬로네이처를 지원할 때 지원했다가 떨어진 밸런스히어로 데이터 엔지니어 직무로 다시 지원했는데요. 왜냐하면 그곳에 네이버 출신 데이터팀 팀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SQL을 테스트로 본다는 점도). 

     

    How?

    다행히 8개월 전 허접(?)했던 SQL 실력은 헬로네이처를 다니면서 많이 늘었고, 무리없이 테스트를 통과하고 합격했습니다. 또한, 재지원했다는 점도 좋게 봐주셔서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밸런스히어로에서 11번가

    상태

    좋은 환경과 뛰어난 동료들 사이에서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빠르게 많은 부분을 배우고 느끼고 경험하였는데요. 인터넷 고등학교를 나와서 매우 뛰어난 동년배 동료, 어리지만 카이스트와 페이스북에서 일하다가 온 외국인 동료들과 근무하면서 많은 자극을 받고 배웠던 것 같습니다.

     

    특히, 돌아보면 수준 높은 동료들 사이에서 일하는 것이 성장과 커리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사무실이었던 위워크 선릉점 - Image from Author

     

    패스트캠퍼스에서 알바로 수업을 들으며 조교 비슷한 일을 하는 것도 진행했는데요. 또한, 양질의 수업을 돈을 벌며 들을 수 있었던 매우 좋은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데이터 엔지니어링 스쿨 조교 알바 - Image from Author

     

    또한, 회사가 인도에서 운영되는 핀테크 서비스회사였기에 인도 출장을 갈 기회도 주어지곤 했습니다.

    출장으로 갔었던 타지마할 - Image from Author

     

    Why?

    다닌지 9개월 정도(?) 되었을 무렵, 자세히는 모르나 CDO(chief data officer) 분이 나가시게 되면서 데이터팀의 수많은 분들이 탈출을 시작하셨습니다. 팀을 다시 꾸리려고 분주하게 노력하셨으나 다시 사람을 뽑고 안정화되려면 한참이 걸릴듯 했는데요. 역시 중요한 주니어 시기에 일도 못하고 배우지도 못하면 안될 것 같아서(어찌보면 새로운 곳을 경험하러 이직할 수 있는 변명이 주어진 것 같기도 했습니다) 이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5 ~ 10곳 정도 지원했는데 2 ~ 3곳 면접을 보고 최종적으로 11번가의 데이터플랫폼팀 데이터 엔지니어 채용이 진행되어서 이직하게 되었네요.

     

    퇴근 후 동료들과 보드게임 - Image from Author

     

    How?

    딱히 면접을 위해 코딩 준비를 한다거나 공부를 다시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맡고 있는 업무에 대한 공부와 이해도 많이 필요했고 주로 '데이터 엔지니어' 직무로 지원을 했었는데요. 밸런스히어로 데이터팀이 잘 구축되어 있었고 그것을 경험하며 조금 더 추가적인 공부를 했기에 많은 준비를 안해도 다양한 길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11번가에서 라인플러스

    상태

    11번가에서 1년은 데이터 엔지니어, 1년은 백엔드 엔지니어로 근무하였습니다 (회고 - 11번가에서의 2년 (데이터 엔지니어, 백엔드)). 데이터 엔지니어로 근무하면서는 온프레미스 환경에서 여러 면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백엔드 엔지니어로 근무하면서는 Java, Spring에 익숙해지며 테스팅, 배포, 서비스 운영 및 개발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또한, 이 블로그를 시작한 때도 이 기간인데요. 코로나로 인해 재택을 하며 통근 시간이 많이 줄어들어서 짬짬이 계속 글을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사내 커리어스토어를 통해 데이터 엔지니어에서 백엔드 엔지니어로 직무를 변경한 부분도 매우 좋은 기회였는데요. 기존에는 파이썬, 하둡, node 약간 정도에 집중된 커리어였다면 백엔드로 넘어 오면서 Java, Spring, Tomcat 등에 익숙해 질 수 있었습니다. 그 부분을 통해 결과적으로 추후에 더욱 많은 기회를 가져다주는 커리어를 쌓게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감정적으로는 어느 정도 급여도 올랐고, 기타 개인적인 일들도 안정이 되어서 근 10년 내에 가장 최적의 시기였던 것 같네요. 

     

     

     

    Why?

    서비스 규모와 B2C에 대한 경험을 위해 좀 더 선진적인 기업들을 위주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눈을 밖으로 돌리니, 너무나 매력적인 롤과 직무들이 많았고요. 꼭 가겠다는 아니고, 진짜 가고 싶은데만 지원해보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How?

    네이버, 카카오, 라인 정도만 지원했습니다. 네이버, 카카오에서 낙방하고 이직에는 면접과 기본지식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요. 이후 하던 다른 공부들을 멈추고 오로지 면접만을 대비하여 라인을 준비하였습니다. 다행히 잘 봐주셔서 합격하였고 이직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Line 키트 - Image from Author

     

    이후 EO에서 기회를 주셔서 촬영한 스토리 :)

    https://www.youtube.com/watch?v=adfS2hrSPYQ

     

     

    Reference

    [1]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2] 아비투스

    [3] 오리지널스

    [4] Programmer's B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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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den Sungbin Cho